영화 '23 아이덴티티(Split)'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DID)를 가진 남성의 다중인격을 중심으로 구성된 작품입니다. 겉으로는 스릴러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면 이 영화는 ‘억압’과 ‘해리’라는 강력한 방어기제가 인간 자아를 어떻게 분열시키고 재구성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심리학적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 이론을 기반으로, 영화 속 케빈이 보여주는 심리 구조와 방어기제의 작용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트라우마와 억압의 메커니즘
주인공 케빈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하며,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트라우마를 경험합니다. 정신분석학에서 트라우마는 단순히 충격적인 기억이 아니라, 자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심리적 위협을 의미합니다. 이를 견디기 위해 자아는 본능적으로 억압(repression)이라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킵니다.
억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나 기억을 무의식 깊숙이 밀어 넣는 심리 작용입니다. 이는 당장은 자아를 보호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속에서 다시 다른 형태로 표출되게 됩니다. 케빈의 경우, 억압된 감정은 다양한 인격의 모습으로 외현화되며, 이는 방어기제가 자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나누는 전략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 속에서 케빈이 만들어낸 인격은 총 23개이며, 각각은 케빈이 억압했던 감정의 일부를 상징합니다.
- 데니스는 통제력과 강박을 상징하며, 과거 학대 상황에서의 공포와 무력감을 보상하려는 자아입니다.
- 퍼트리샤는 어머니와 유사한 모성적 권위로 구성된 인격으로, 억압된 복종 욕구와 공포를 담고 있습니다.
- 헤드윅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현실 도피 욕구를 반영한 퇴행적 인격입니다.
이 인격들은 마치 케빈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 조각’처럼 작용하며, 억압의 부산물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자율성을 갖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억압된 기억이 특정 인격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며, 본래 자아는 그 기억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DID 환자들에게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인격 간 기억의 벽이 존재하고 정보가 단절되는 ‘기억 해리(mnestic dissociation)’와 일치합니다.
이러한 기억의 단절과 감정 분리는 억압이 단순한 회피 메커니즘을 넘어서, 자아 구조 자체를 재조직하는 수준까지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강해지면 자아는 더 이상 통합적 기능을 할 수 없고, 무의식이 자율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케빈의 분열된 자아는 바로 그 이론의 극단적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해리와 자아 분열의 구조
‘해리(Dissociation)’는 자아가 외부의 충격이나 감정적 위협을 견디기 위해 기억, 감정, 행동을 의식적으로 분리시키는 방어기제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일시적인 감정 마비, 주의력 상실 등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케빈처럼 극심한 외상경험이 반복될 경우 자아는 스스로를 분할시켜 현실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영화에서 케빈의 자아는 완전히 분리되어, 각 인격이 고유한 기억과 언어,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현실에서 임상적으로 관찰되는 ‘다중인격 증상’과 매우 유사하며, 각 인격이 특정 기능이나 감정을 전담하는 형태를 띱니다. 예컨대 한 인격은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다른 인격은 트라우마 기억을 보관하며, 또 다른 인격은 위협 상황에 반응합니다.
이러한 해리의 구조는 융의 ‘그림자 자아(Shadow Self)’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융은 무의식 속에 억압된 본능과 감정이 의식에서 분리되어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그림자는 무시할수록 더 강력하게 자아를 위협하며, 끝내 자아 전체를 지배하려고 시도합니다. 케빈에게 있어 ‘비스트’는 바로 그 그림자 자아의 집대성이며, 자아 해리의 끝에서 출현한 무의식의 괴물입니다.
해리는 방어기제인 동시에 자아 붕괴의 전조이기도 합니다.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비스트’는 육체적 능력까지 변화시키며, 현실의 규칙을 넘어서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이는 과학적으로는 과장된 표현이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심한 해리 상태에서 자아의 신체 감각과 생리적 반응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임상심리학에서는 해리성 장애 환자들이 각 인격에 따라 혈압, 맥박, 뇌파가 달라지는 사례가 보고된 바 있으며, 이는 영화 속 장면과도 흡사한 과학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방어기제와 사회적 윤리의 경계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대중의 시선과 윤리적 태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집니다. 대부분의 대중은 ‘다중인격’을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지만, 실제 환자들은 영화처럼 폭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상처와 공포로 인해 자아를 나누는 과정을 통해 생존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프로이트와 융 모두 방어기제를 인간의 ‘정신적 면역 시스템’으로 보았습니다. 방어기제는 병리적 반응이 아니라 자아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심리적 노력입니다. 케빈이 만든 인격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생존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방어기제를 병리 화하기보다는, 공감과 이해의 시선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케빈의 비극은 단지 그의 질병 때문이 아니라, 그를 이해하지 못한 사회, 고통을 무시했던 주변 환경, 그리고 그를 돕지 못한 시스템에서 비롯되었음을 영화는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실에서도 DID 환자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이 정체성의 혼란이 아닌, 세상의 오해와 배척이라는 점과 일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