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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넷 속 숨어있는 과학 요소 분석

by 행운아와줘 2025. 7. 14.

테넷 속 숨어있는 과학 요소 분석

2020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TENET)’은 시간 역행과 물리학 개념이 결합된 복합 SF 영화입니다. 시공간의 구조를 실험하는 이 영화는 실제 이론물리학에서 다루는 개념들(엔트로피, 열역학의 법칙, 양자역학, 블록 우주론 등)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며 관객을 깊은 물리학적 사유의 세계로 끌어들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본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 보면 영화 속에 숨어있는 물리학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테넷’의 핵심 개념을 물리학 이론과 연결하여 자세히 분석하고, 이 영화가 얼마나 정교하게 과학적 사고를 영화 서사에 접목시켰는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엔트로피: 시간의 방향성

테넷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물리 개념은 ‘엔트로피(entropy)’입니다.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어떤 고립된 계(system)에서는 무질서도가 자연스럽게 증가한다는 원리를 의미합니다. 즉, 모든 물리적 시스템은 ‘정돈’에서 ‘무질서’로, ‘질서 정연한 상태’에서 ‘에너지 소모와 확산 상태’로 자연스럽게 이동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컵이 깨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나무가 불에 타 재가 되면 다시 나무로 복원되지 않는 등의 비가역성(irreversibility) 현상들이 전부 엔트로피 증가 현상입니다.

테넷에서는 이 ‘엔트로피의 방향성’을 거꾸로 뒤집는 장치가 등장합니다. 인버전(inversion)이라는 기술을 통해 물질의 엔트로피를 반대로 설정하면, 그 물체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총알을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벽에 박힌 총알이 총구로 되돌아오고, 불이 붙은 차량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연출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영화적 기법이 아니라, 실제 물리학에서도 논의되는 ‘시간의 비대칭성’과 연결된 개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현실에서 엔트로피는 자연적으로 감소하지 않으며, 이 과정은 막대한 에너지 손실과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테넷은 이 ‘불가능’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물리학 개념을 기반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인버전 기술: 영화 속 시간역행의 원리

테넷 속 '인버전(Inversion)'은 단순한 시간여행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자체를 거꾸로 살아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상태는 영화 내에서는 '인버전 기계'를 통해 만들어지며, 이 기계를 통과한 인물이나 물체는 물리적 법칙이 반대로 적용되는 세계를 경험합니다. 즉, 숨을 쉬기 위해 산소마스크가 필요하며, 열은 추운 방향으로 흐르고, 중력이나 관성의 방향성도 바뀐 세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영화 속 장면에서도 시각적으로 설계되어, 관객이 물리적 차이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연출되었습니다.

놀란 감독은 이러한 ‘인버전 세계’를 단순한 시간 재생 장면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배우들이 인버트된 동작을 훈련하여 거꾸로 연기하고, 카메라도 정방향과 역방향을 동시에 촬영하여 두 세계가 부딪히는 장면을 구성합니다. 이는 물리학적 상상력을 시각적 기술과 연기, 편집의 협업으로 구현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과학적으로 봤을 때, 이와 유사한 개념은 '시간의 대칭성(time symmetry)'이라는 이론에서 출발합니다. 물리학에서는 대부분의 기본 법칙—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 법칙이나 슈뢰딩거 방정식—이 시간에 대해 대칭적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는 물리 법칙이 시간의 방향에 관계없이 성립한다는 의미이며, 이론상으로는 역행하는 시간에서도 법칙은 성립 가능하다는 가정을 뒷받침합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열역학의 비가역성’이 이 가정을 제한하지만, 양자 수준에서는 충분히 탐색 가능한 개념입니다.

양자역학과 시간개념: 이론적 가능성

‘테넷’이 제시하는 시간 개념은 고전역학적 선형 시간 개념을 넘어, 양자역학적 시간관과 철학적 개념인 '블록 우주론(block universe theory)'에 근거합니다. 블록 우주론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이미 존재하며, 우리가 시간 속을 흐른다고 느끼는 감각은 단지 우리의 인지적 착각에 불과합니다. 즉, 시간은 우리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4차원 구조 내에서 인식하는 좌표에 가깝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더 나아가 입자의 상태가 결정되기 전까지 중첩 상태로 존재하며, 관찰에 의해 결과가 확정된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이 개념을 확장하면, 어떤 사건의 결과가 이미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인버트 된 시점에서 그 결과를 먼저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설정이 이론적으로 허용됩니다.

또한, 테넷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결정론’은 양자결정론(Quantum determinism) 혹은 양자해석학에서 논의되는 주제입니다. 이는 모든 사건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뿐이라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합니다. 이와 관련된 패러독스적 장면으로는 주인공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가 자기 자신을 도와주는 장면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인과 역전 현상 등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플롯의 트릭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서사에 담아낸 영화적 장치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놀란은 테넷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물리적 인식이 허구일 수 있다는 전제를 실험적으로 재구성합니다. 이 지점에서 테넷은 SF를 넘어 철학적 물리학 영화로 자리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