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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영화제 수상작 소설가의 영화

by 행운아와줘 2025. 7. 9.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 소설가의 영화

홍상수 감독의 2022년 작품 ‘소설가의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에서도 특히 ‘서사적 분절’과 ‘자기 반영성(self-reflexivity)’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일상 대화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야기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방식과 창작자의 자의식이 깊게 깔려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다중적 감정과 해석의 가능성이 주는 울림은 왜 이 작품이 수상을 할 수 있었는지 느끼게 해 줍니다. 본문에서는 ‘소설가의 영화’를 중심으로, 홍상수 감독 영화에 나타나는 서사 구조의 해체와 자아 성찰적 요소를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서사의 분절: 시간성과 구조의 재조합

‘소설가의 영화’는 명확한 플롯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기승전결이라는 고전적 내러티브 대신, 우연히 만나는 인물들 간의 대화와 일상적인 사건의 반복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러한 형식은 분절된 에피소드적 구성을 기반으로 하며, 관객은 영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분절된 서사 구조는 의도적인 파편화(fragmentation) 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형화된 사건을 배치하지 않고, 마치 일기장처럼 구성된 장면들의 배열은 현실의 시간감을 더욱 직접적으로 반영합니다. ‘소설가의 영화’ 속 인물들은 같은 공간을 반복해서 걷고, 유사한 대화를 나누며, 의미 없는 흐름처럼 보이지만 점진적으로 인물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분절성은 또한 기억의 흐름과 닮아 있습니다. 플래시백이나 시간의 점프 없이, 인물이 경험한 일상 속 순간들을 카메라는 무심하게 따라가며 관찰합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인물의 시점이 바뀌고, 흑백 화면이 컬러로 전환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시간성과 구조의 변환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현실과 창작, 기억과 상상이 경계 없이 넘나드는 구성이죠. 이러한 구성은 관객들에게 단순한 시각적 변화가 아닌 정서적 전환점으로 기능하며 큰 울림을 줍니다.

이는 미셸 드 세르토의 일상성 개념처럼, '거대 서사'가 아닌 '작은 서사들'의 연속으로 삶을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그 어떤 결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이야기의 ‘중단된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합니다.

자기 반영성: 창작자 자신을 들여다보는 영화

‘소설가의 영화’는 자기 반영성(self-reflexivity)의 전형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준희’는 중년의 여성 소설가이며, 은퇴 후 다시 글을 쓰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배우 출신의 인물 ‘길수’를 만나 “영화를 찍자”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두 사람은 짧은 단편영화 형태의 장면을 함께 만듭니다. 이 장면에서의 미묘한 거리감, 시선의 배치, 카메라의 고정적인 시점은 모두 ‘영화 속 영화’라는 구조를 더욱 강하게 부각합니다.

이러한 서사는 홍상수 감독 자신이 창작자이자 영화인으로서 고민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반영합니다. 특히 ‘감독으로 변모하는 소설가’의 설정은, 영화와 문학, 창작과 매체 간의 경계를 탐구하는 실험이기도 합니다. 관객은 이 작품을 통해 홍상수 감독이 창작의 진정성,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 그리고 삶과 예술의 간극에 대해 자문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관객들에게 감독의 실험적 표현에 자유롭고 다양한 평가를 내게 합니다.

더 나아가, 영화 속 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감독의 시선’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배우 ‘길수’는 자의식이 적은 인물로 묘사되며, 창작에 대한 감각도 본능적입니다. 반면 ‘준희’는 매우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인물로,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반추하는 순간이 많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창작자가 스스로를 해체하고, 타자화하며, 다시 돌아보는 서사적 장치로 읽힙니다.

말과 이미지, 형식의 자의식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말이 많은 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물들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사소한 말을 반복하며, 종종 돌발적인 어조로 갈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소설가의 영화’ 또한 이런 대화의 구조를 따르지만, 동시에 그 대화 안에는 말의 한계와 언어의 자의식에 대한 반성이 숨어 있습니다.

준희는 영화 내내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돌려 말하거나, 순간의 감정을 억제하려 애씁니다. 또한 대화 중간의 침묵, 망설임, 시선의 회피는 영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비언어적 요소’들은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하며, 언어가 결코 감정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와 함께 눈여겨볼 지점은 카메라의 움직임입니다. ‘소설가의 영화’는 대부분의 장면을 단일 카메라, 롱테이크로 구성하고 있으며, 줌 인/아웃을 최소화한 채로 정적인 프레임 안에서 인물의 말과 움직임이 조율됩니다. 이는 카메라의 자율성을 제거하고, 인물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미장센 구성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마치 소설이 한 문단을 구성하듯, 홍상수의 장면 하나하나는 내러티브가 아닌 형식 자체가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즉, 장면의 리듬과 구성, 대사의 공백과 반복이 하나의 서사 구조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소설가의 영화’는 텍스트적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