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개봉한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유전자 치료 바이러스가 인류를 멸망시킨 상황을 배경으로, 면역 생존자와 변이 된 생명체 간의 긴장과 생존을 다룬 SF 스릴러입니다. 영화는 바이러스와 인간은 결코 단선적인 적대 관계만이 아니라, 진화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전자 조작 바이러스의 과학적 가능성과 면역체 생존자의 유전적 특성, 바이러스와 인간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유전자 조작 바이러스 현실 가능성
영화 속 ‘크리펜 바이러스(KV)’는 원래 암 치료를 위해 유전자 조작된 홍역 바이러스를 기반으로 개발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변이를 거치면서 인류 대부분을 죽이고 일부를 괴물처럼 변형시킵니다.
현실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술이 존재합니다. 현대 유전자 치료는 바이러스를 유전물질 전달 수단(벡터)으로 활용합니다. 아데노바이러스나 레트로바이러스, 홍역 바이러스 등이 치료용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많으며, 현재 암, 유전병, 희귀 질환 치료에 임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여전히 고위험 영역입니다. 유전자가 잘못된 세포에 삽입되거나 면역계가 과도하게 반응하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 프랑스의 한 유전자 치료 임상시험에서는 레트로바이러스가 백혈병을 유발하는 사례가 있었고, 최근에는 CRISPR 유전자 편집 기술을 적용한 임상에서 오프 타깃(비의도적 유전자 절단)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과학적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확장하여,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신경계를 파괴하고, 뇌 기능과 생리 반응까지 바꾸는 상황을 제시합니다. 이 설정은 광견병이나 특정 뇌염 바이러스처럼 신경계에 영향을 주는 바이러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이며, ‘치료제의 실패가 곧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과학적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유전자 면역 생존자의 가능성
영화의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과거 군 소속 바이러스학자로, 치료제 개발에 참여했으며 자신의 혈액으로 백신을 개발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선천적 면역체가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정답은 ‘예’입니다. 실제로 일부 사람들은 특정 바이러스에 대해 자연 면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CCR5-Δ32 유전자 돌연변이 보유자입니다. 이 유전자는 바이러스가 면역세포에 침투하는 수용체를 차단해 감염 자체를 막습니다. 유럽계 인구의 약 1% 정도가 이 유전자를 이중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영화 속 네빌 역시 이러한 유전적 변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이러스의 표적이 되는 특정 수용체나 단백질이 결핍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자신의 면역 체계를 통해 항체나 중화인자를 생성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한 개인의 유전적 면역이 전체 인류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유전적 일치, 면역 반응의 범용성, 바이러스 변이에 대한 저항성 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바이러스가 계속 돌연변이를 거듭한다면, 초기 항체나 치료제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실제 코로나19 바이러스 변이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한 번의 면역이 영구적 방패가 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영화 속 설정처럼 한 사람의 면역체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극적인 영화적 장치로는 효과적이지만, 현실적인 면에서는 훨씬 복잡한 유전적 다양성과 면역 체계의 복합성을 고려해야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이러스와 인간, 진화적 공존의 가능성
나는 전설이다에서 등장하는 ‘다크시커(Darkseeker)’는 단순히 감염된 괴물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강화되고 새로운 생리 반응을 갖춘 변이체로 그려집니다. 이들이 광과민성을 갖고, 조직적으로 행동하며, 감정과 지능을 일부 유지한다는 설정은 파괴된 인간이 아닌 진화된 생명체일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과학적으로도 이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설정은 아닙니다. 인간 유전체의 약 8%는 바이러스 유래 유전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인간 발달, 면역, 생식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이미 수천 년에 걸쳐 바이러스와 공진화(co-evolution) 해왔으며, 바이러스는 단순한 병원체가 아닌 유전적 정보전달자, 때로는 진화 촉진자 역할을 해왔다는 뜻입니다. 특히 바이러스가 인간 세포 내에 삽입되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 해당 바이러스가 새로운 생물학적 특성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간 태반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 중 일부는 바이러스 유래 유전자입니다. 이는 바이러스가 유전체를 안정화시키거나 생식 기능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바이러스와 인간이 반드시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진화를 통해 새로운 균형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즉, 다크시커는 실패작이 아닌, 진화된 생명체일 수 있으며, 인간은 기존의 유전자 구조를 고수하기보다 변화된 환경에서 공존할 수 있는 유전적 균형을 선택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